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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

[스크랩] 겸우선사 반야심경 강해

by 慧明花 2012. 11. 24.

◇ 반야심경은 성불하는 경

 

여기에 소개하는 겸우謙牛 선사의『반야심경』설법은 함양 이룸사 대웅전과 안성 석남사 대각전에서 설한 내용을 저자가 녹취錄取하여 편집編輯한 것이다. 석남사에서는 대웅전大雄殿이란 말이 아주 잘못되었다며 현판을 내리고 대각전大覺殿으로 바꿔 단 후에 설하셨다.

 

 

 

 

 

§ 잃어버린 내 물건을 찾자

 

겸우謙牛 선사가 법석에 오르자 정무 스님이 요령을 치시며 설법說法을 청하셨다. 목탁 대신에 왜 요령鐃鈴을 흔드신 것이냐고 나중에 정무 스님께 물었더니 모든 영가靈駕들도 함께 들으라는 것이라 하셨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확인된 대중 이외에도 눈에 안 보이는 많은 대중이 함께 있었다는 말이 된다.

 

화엄경[華嚴經]이나 법화경[法華經]을 설할 때 시방국토十方國土로부터 온 수를 알 수 없는 많은 보살, 천인, 아수라 등 대중이 함께 하였다는 표현들이 새롭게 스쳐갔다. 선사는 정좌를 하시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여시었다.

 

가깝지도 않는 곳에 이렇게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여기 오신 목적은 누구한테 무엇을 얻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기 물건을 찾으러 온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본래의 자기自己 물건을 찾아주려는 종교입니다.

 

각자가 자기 물건을 갖고도 자기自己 물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자기 눈을 갖고 자기 눈을 보지 못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자기 눈을 갖고 자기 눈을 봅니까? 여기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아야겠습니다.

 

달마達磨 스님이 인도印度에서 중국에 오신 것은 불법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불법을 전하러 오셔서 위법망구爲法忘軀[법을 구하기 위하여 몸을 버릴 각오]하신 것입니다. 소림굴에 들어 9년을 혼자 지내며 걸식乞食하셨으니 그 고통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9년을 입을 다무시고 벽만 바라보고 않아 계셨고, 밥을 얻으려 다닐 때는 발우鉢盂를 내밀고는 말을 안 했어요. 그래서 그 지방 사람들은 그가 벙어리인줄 알았어요. 혜가慧可 스님이 달마 스님에게 법을 구하려고 찾아갔으나 만나주질 않았어요. 그래서 혜가는 밖에서 합장하고 달마 스님이 나오실 때까지 서 계셨어요.

 

달마達磨 스님이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가 이 추운 겨울날에 눈이 허리까지 찰 때까지 서 있기에 하도 딱해서,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혜가慧可는,  ‘감로의 문을 열어 주소서, 중생을 제도하여 주소서.’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달마는,

 

‘근기가 약하고 그릇이 작은 자는 몸만 고달픈데 그런 근기를 갖고 법을 구할 것이냐고’ 되물었지요. 이 말을 들은 혜가 스님은 자기 팔을 끊어 보였어요. 이 때 달마 대사는, ‘과거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법을 구하기 위하여 몸을 버렸거늘 네가 내 앞에서 팔을 끊어 바쳤는데 가히  법을 구할만 하구나.’ 했어요.

 

겸우謙牛 스님은 게송偈頌을 하나 읊으시었다.

 

모든 부처님의 심법心法을 들어서 알 수 있겠는가?
남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니라.

 

諸佛本來法印 聞不可得 非從人得

제불본래법인 문불가득 비종인득

 

내 마음이 지금 편치 않사오니 내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
그 마음을 가져와라 그러면 편안케 하여 주겠다.

 

我心未寧 乞師與安心 將心來 與汝安

아심미영 걸사여안심 장심래 여여안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너의 마음을 편케 해주었노라.

 

覓心了不可得 與汝安心竟

멱심요불가득 여여안심경 


바로 여기서 혜가慧可 스님은 깨쳤어요. 육조六祖 스님까지는 참선參禪해서 깨친 것이 아닙니다. 이같이 한 말씀 듣고는 깨달아 생사대사를 해결[見性]했어요. ‘내 마음이 지금 편치 않사오니 내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그러면 불안하다는 네 마음을 내보여 달라.’고 하는 그 말 한 마디에 혜가[二祖]는 깨쳤어요.

 

마음을 찾아보되 형체가 없으니 이것이 무심無心아니요, 무심에 무슨 마음이 불편하겠어요. 달마 스님이  법을 전하러 오셔서 팔을 끊어 바친 혜가 스님에게도 자기自己의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었지 다른 물건 같은 것 전해 준 것 없어요. 바로 이것이 불법佛法입니다.

 

부처님이 49년간 설한 법도 이러 할 뿐, 이 밖엔 다른 것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반야심경』이야 말로 다른 것이 아니고 전부 잃어버린 자기 물건을 찾아주는 경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심경心經입니다.

 

선사는 잠시 말이 없으시다가 다시 게송을 읊으신다.

 

내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나 종이와 먹으로 된 경이 아니다.
경을 열어보니 한 자도 없으나 항상 대광명이 비치고 있다.

 

我有一經卷하니 不因紙墨成이라

아유일경권       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常放大光明이라!

전개무일자    상방대광명

 

왜 내가 이 게송을 읊느냐 하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경[]이라는 겁니다. 마음 없는 사람 어디 있어요. 『반야심경』은 270자인데 그 중에 무[無]가 21자나 들어 있어요. 무자無字가 거듭거듭 들어 있는 것은, 없는 것을 갖고 없는 것을 보여 주려니 그렇습니다. 이 심경은 옳게 설하고 옳게 들으면 성불成佛하는 경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제일 큰  보물이 뭐요?

 

금강경[金剛經]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똑같은 경입니다. 금강金剛이란 말과 반야般若라는 말만 다를 뿐입니다. 금강이란 보물 중의 제일이라는 것으로 금은 광석 속에 들어 있지요, 우리들 각자 자신은 산입니다. 인아산人我山이라고도 합니다. 이 자신 속에 들어있는 자성[自性]은 금과 같은 것입니다.

 

산에 있는 광석鑛石 속에 들어 있는 금은 캐내야 금이지 광석 그대로를 금이라 할 수 있겠어요? 광석을 부수고 금을 찾듯이 내 속에든 본성本性을 찾아야 보물입니다. 찾지 못하면 보물이 아닙니다. ‘마하’는 크다는 말이고 ‘반야’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크다는 것을 봅시다.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은 무엇입니까? 지혜는 밝다는 것인데 세상에서 제일 밝은 것은 무엇이냐? 이것이 다 자신自身에 있기 때문에 자기自己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선사는 대중을 한번 둘러보시더니, 김 거사에게 묻는다.
 “지혜 있으니 한 번 대답해 보시오. 무엇이 제일 크다고 하겠어요?”
 “자기 자성은 삼라만상을 다 품을 수 있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제일 큽니다.”

 

 “그러면 밝은 것은?” 선사는 또 물었다.
 “자기 자성 속에서 온갖 지혜와 광명이 나오니 자성自性이 제일 밝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 같이 밖으로 보는 물건 중에서 무엇이 제일 큰가?”
 “견체가 제일 큽니다. 큰 것 또한 모양과 그릇이 없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제일 큽니다.”

 

 “경찰이라 좀 달라! 뭐 조사하려 다니다 보면 지혜가 없으면 감춰진 것 찾을 수 없거든.”
 김 거사가 경찰이라는 것을 알고 하시는 말씀이다. 대중 가운데 선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데 흐뭇하신 모양이다. 선사는 말씀을 이어 가셨다.

 

 반야다라 존자가 달마 스님을 찾아가서, 모든 물건 중에 어떤 것이 제일 큰가? 라고 물으니 ‘자성自性이 제일 크다.’라고 했어요. 다른 스님들은 허공이 최대라는 분도 있었어요. 그러나 자성은 허공이 몇 개가 들어가도 남는 것입니다. 허공은 제 이름자 하나도 못내 놓는데 우리가 말하기를 허공을 몇 개를 품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선사는 게송을 읊으신다.

 

  모든 물건 중에 어떤 것이 제일 큰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제일 크다.

 

   於諸物中  何物最大  不起無上

   어제물중  하물최대  불기무상

 

  모든 물건 중에 어떤 것이 제일 높은가?
  인아가 제일 높다.

 

  於諸物中 何物最高  人我最高
  어제물중 하물최고  인아최고  
  
여기서 말하는 인아[人我, 나]란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자마자 말씀하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입니다. 인아는 각자 자신들 속에 다 들어 있는데 ‘그것을 못 보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 찾아 갖는 법이 불법佛法이요, 이것을 찾아 가지면 각자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인 동시에 영원히 죽지 않는 무한생명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해서 인아人我가 최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달마 스님은 공부해서 깨친 것이 아니라 이렇게 깨쳐 갖고 나온 분입니다. 그래서 반야다라 존자가 인가印可해서 달마가 된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이 바로 이것을 찾아주려는 것입니다.
 밝은 것은 무엇이냐? 마음이요 자성이라 할 수밖에 없어요.

 

 

 

 

§  눈과 광명을 여의고 보는 놈을 보라

 

나는 벌써 30년 전부터 이것을 보려면 눈과 광명과 현실現實을 여의고 보라고 했어요. 이것을 꿈으로 비유를 들었거든, 꿈이란 것이 눈과 광명과 현실을 여의었거든, 이것은 생각으로 보는 놈입니다. 눈감아도 세계 일주를 할 수 있고 모양이 없는 놈입니다.

 

 생각으로 보는 놈은 멀다고 해서 시간이 더 걸리고 가깝다고 해서 시간이 덜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 미국이나 영국英國서 본 것을 생각해 보는데 시간이 더 걸리는 것 아니고 바로 문밖의 것 생각하는데 시간이 덜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집에 돌아가셔서 이런 것 생각하여 공부에 이용토록 하십시오.

 

참선參禪 따로 없어요. 보는 놈 보는 것이 견성見性입니다. 모양을 여읜 놈, 현실을 여읜 놈, 이렇듯이 50년 산 사람이 50년 전 것을 생각해 보나 여기 오기 바로 전 것을 생각해 보나 걸리는 시간은 같아요. 한 생각 퍼뜩 일으키면 보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현실을 여의고 보는 것입니다. 외국外國에 돌아다녔던 것을 보는 것이 곧 현실을 여의고 보는 것 아닙니까!

 

선사는 여의고 보는 예를 계속 드신다.
여기 오기 전에 자기 집에서 있었던 일 생각해 보는 것, 현실을 여읜 것 아닙니까! 그렇듯이 무량겁 전 것이나, 바로 이 시간 전 것이나, 무량겁 후의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나, 다음 시간을 생각하는 것이나, 한 생각 퍼뜩 일으키면 봅니다. 바로 이놈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겸우謙牛 선사는 다시 게송을 읊으셨다.

 

 한 생각 마음이 무량겁이니 오고 감이 없네.
 이와 같이 알면 삼세가 하나요, 생사가 본래 있는 것 아니니라.

 

一念服無量劫 無來亦無劫

일념복무량겁 무래역무겁 


如是了知三世欣然 生死去來本無

여시료지삼세흔연 생사거래본무
 

현실을 여의고 보는 놈을 보면 무량겁을 한 생각에 보니 삼세三世둘이 아니다.

여기서 생사거래를 마치는 것입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

바로 이 소식을 보여준 것입니다.

 

 

 

§ 반야지혜로 본 오온은 이렇다

 

             선사는 지그시 눈을 감으시고 반야심경을 암송暗誦하셨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  ──────────────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受想行識  
            
 眼耳鼻舌身意 色聲香味觸法 眼界 乃至 意識界 無無明 
          
   無無明盡 乃至 老死 亦老死盡 苦集滅道 智 亦
          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罣碍 罣碍故 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上呪 是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3-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암송暗誦을 끝내신 선사는,

마하는 크다. ‘반야’는 지혜, ‘바라밀’은 행[行]을 의미합니다. 큰지혜로 성불하려면 행이 있어야 합니다. 행은 마음을 갖고 하는 것이지 다른 것을 갖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자재보살은 밖에 있는 보살이 아니고 각자 자신 속에 있는 보살입니다. 자신自身 속에 있는 자재自在한 마음입니다.

 

경계만 따라다니는 마음이 아니고 자리이타自利利他[자기도 남도 이롭게 함]와 보리군생菩提群生[중생을 널리 구제]을 위해서 남을 헤치지 않고 남을 위해 좋은 일만 하는 보살행을 하는 것이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입니다. 누구나 이러한 행을 하면 모두 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만이 보살이 아니라 그러한 행을 하면 여러분이 다 그런  보살인 것입니다. 각자 자신을 찾으면 각자는 삼세제불三世諸佛중 일불一佛[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공개공

 

 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 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관하여

 

 오온五蘊이 무엇이냐? 색수상행식[色受相行識]을 말합니다.

  색은 무엇이냐? 눈으로 보는 삼라만상이 전부 색입니다.

 

첫째로 여기서 말하는 이 색[色]은 눈으로 보는 색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이 모두 색입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눈, 귀, 코, 입, 몸, 생각]의 상대相對 경계인 색성향미촉법이 모두 색입니다.

 

둘째로 다음이 수[受]인데 만일 눈으로 보는 삼라만상만 색이라 한다면 수라는 말과 맞지가 않아요.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냄새 맡는 것, 입으로 맛보는 것, 몸으로 느끼는 것,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 전부 색[色]이요. 이 모두 육문[六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로 상[相]입니다. 받아들이면 생각합니다.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생각납니다. 부딪칠 때마다 생각하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넷째로 행[行]이란 것은 무엇인가? 받아들인 것을 내보내고
안내보내고 하는 것은 행에 따라서 일으키는 알음알이입니다.

 

 다섯째 식[識]이 일어납니다.

 

이것들을 오온五蘊이라고 해요, 왜? 오온이냐 하면 앞의 다섯 가지를 보따리처럼 쌌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색, 수, 상, 행, 식을 싼 보따리가 바로 각자 자신이란 말입니다. 보살행을 닦으려면 이것을 다 없는 것으로, 공[]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살은 이것을 지혜의 눈으로 비추어 보아서 다 공[空]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쉬운데 행에 가서는 어렵습니다. 이것 공한 것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 뜻을 모르면 『반야심경』을 천만 번 외워도 소용이 없어요.“

 

 

§ 없는 것 보는 것이 견성이다

 

왜 공한 것이냐? 눈으로 보는 ‘색’부터 봅시다. 여러분 여기 오기 전에는 여기가 없었지요. 여기 와서는 다 각자 자기 집, 자기 고장이 없지요. 여기서 여읜 것, 여기에 와서는 여기가 나타났지만 여기를 떠나면 여기도 없는 것 아닙니까. 내가 떠나면 나까지도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없는 놈이 자기自己 물건입니다.

 

있는 것은 있기 때문에 바뀌고 생명生滅이 있는 것입니다.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바뀌지 않고 생멸도 없습니다. 이것이 자기 물건이요! 진정한 자기自己이고 이것을 찾아 주자는 것이 곧 불성佛法이고, 이것을 보는 것이 곧 견성[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있는 것만 보고 없는 것은 못보고 있어요. 바깥과 남의 경계만 따라다니느라 바쁘기만 하고, 물질의 노예[奴]노릇만 하고, 진실로 없는 자기 물건은 못 보니 답답한 것 아닙니까!

 

선사의 목소리는 80대 노인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쳐흐른다.

 

다음은 귀로 듣는 것, 귀는 모든 소리를 여읜 것 아닙니까? 여러분 수원水原서 듣던 소리는 여기 함양咸陽에 와서는 한 마디로 없지 않습니까? 여기 와서는 내 소리, 목탁소리, 종소리 듣고 있지만 여기를 떠나면 모두 없는 것 아닙니까? 소리는 났다가 곧 없어지지만 듣는 몸은 없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없어지질 않습니다.

 

이 놈은 현실現實을 여읜 놈이기 때문에 우리 몸이 천만 번을 죽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여기 나온 것도 이것을 찾아주기 나온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나올 까닭이 없어요. 여러분도 이것을 조금이라도 인식認識하기 위해서 여기를 찾아온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무엇 하러 새벽바람 쏘이며 이렇게 멀리 천리 길을 찾아오겠습니까?

 

냄새도 그렇지 않아요? 똥은 구려도 똥 무더기를 여의면 똥 냄새는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 없는 놈은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空]입니다. 관자재보살은 이것을 잘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당 머물 바 없는 텅빈 곳에 머무는 마음]이라는 ‘금강경’의 말씀도 이 뜻입니다.

 

 

§ 자성自性이 진정한 보물이다

 

이 없는 것은『금강경』에서 말했듯이 상[相]을 떠나야 알 수 있는 자리이며, 우리가 이것을 찾아 가자면 금강석보다 훨씬 귀한 보물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또 이 몸은 무한한 광명光明의 지혜를 내는 보물단지입니다. 그 보물을 ‘마하반야’라 하지요, 무한히 큰 지혜광명이란 말입니다. 어찌 찾지 않을 수 있겠어요.

 

사상[四相]이란 말이 있는데, 아상我相[이 몸이 ‘나’라는 생각], 인상人相[ ‘나’ 아니면 ‘남’이라는 생각], 중생상衆生相[세상일에 집착함], 수자상壽者相[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말하지요. 이 사상四相을 떠나야만 자성을 볼 수 있어요.

 

이는 마치 순금이 흙 속에 묻혀 있으나 흙을 털어내고 잡석을 제거해야 드러내는 것과 같아요. 돌 속에 묻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흙에서 캐내고 정련精鍊을 해야 금의 가치를 갖는 것과 같이 내 속에 본래 묻혀 있는 자성自性을 드러내야지요.”

 

 선사는 대중을 살피시더니 김 거사에게 또 질문을 던지신다.
 “세상에서 허공보다 큰 것이 무엇인지 일러 보시오.”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어째서 그렇소?”
 “자성인 마음은 허공, 삼라만상을 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바로 일렀어요, 지혜가 밝은 사람이라 제대로 일렀구먼. 이 자성自性이란 것이 내 속에 들어있는데 이것을 알면 천상천하유아독존이야. 달마 스님도 이 도리道理를 알고 깨쳤으니 9년간 굴 속에서 지내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깨치고 난 자성은 어떠하냐?” 선사는 자문하시면서,
 “말로 짐짓 표현하자면 밝음이야. 지혜의 밝음이야!”

 

선사는 다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빛이 물체物體에 닿으면 이 눈이 물체로부터 반사되는 광을 인식認識하는 것인데, 광명이 없다면 볼 수 없는 것이요. 눈을 여의고도 못 보는 것이요. 보는 대상對象이 사라져도 못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모두 여의고도 보는 놈이 있어요. 이 보는 자, 보는 대상을 여의고도 깜깜한 암흑暗黑의 한밤중에도 보는 놈이 있어요, 생각으로 보는 놈이 있지 않나요, 현실을 여의고 보는 일념(한 생각 일으키는 놈)이 있어요. ‘그 놈은 무량겁 전에도 있었고 무량겁 후에도 있었다.’ 이것입니다.

 

 


§ 자성을 보는 법을 들어보시오 

 

겸우 선사는『반야심경』의 첫머리를 읊으신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공개공  도일체고액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반야의
대 지혜로이 몸을 보니 모든 고액으로부터 벗어났도다.

 

이 경은 마음, 자성 자리를 보게 하는 경인데, 자성은 내 자신 속에 있어요. 어떻게 해야 내 속에 있는 이 놈을 볼 수 있느냐? 이 자성은 아상我相을 버려야 볼 수 있어요, 그러려면 우리 이 몸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선 이 몸뚱이, 오온五蘊으로 된 우리 몸인 오온五蘊 보따리를 공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보살은 실제로 공으로 보고 있어요.

 

겸우 선사는 청중을 둘러보시고는 오온이 없는 것을 관찰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셨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인 이 오온五蘊을 이용해서는 없는 자리로 들락날락,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살피면 초 견성은 할 수가 있어요.

 


§ 전체는 어둠을 봅니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사리자여, 색이나 공이나 다르지 않고 공이나 색이나 다르지 않다.

 색을 대하는 것이 곧 공을 대하는 것이고
 공을 대하는 것이 곧 색을 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리자舍利子’는 지혜 제일이라 부르기도 하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의 한 분이나, 각자의 자성自性 속에 있는 지혜를 일컫는 지혜의 대명사이지요.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선지식善知識’이라는 말을 썼지요. 모두 같은 뜻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모두 지혜를 갖고 계시지요, 그 많고 적음은 불문不問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선지식善知識’입니다. 세상 물정을 안다는 것도 지혜 아닙니까?

 

세상 물정에 대해서야 여러분이 나보다 10배, 100배 뛰어나지요. 아마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로는, 나 같은 사람은 없을 거요. 나는 외국어 한 마디도 몰라요. 에너지가 무엇인지, 퍼센트가 뭔지 몰라요. 그래서 어느 날 정무 스님에게 좀 가르쳐 달라 했더니, 말로 뭐라고 일러주는데 이 늙은이 기억할 리 있겠소.

 

정무 스님을 바라보시며 싱긋이 웃으신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이것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살리고 죽이는 도리가 여기에 있어요,
이것을 알면 견성見性이요, 모르면 화두話頭로 삼아야 해요.

 

요새 ‘반야심경’을 보면 ‘물질이 곧 허공’이요. ‘허공이 곧 물질’이라 내 놓았는데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보는 놈을 죽여 놓는 것이 됩니다. 태양도 태양을 둘러싼 허공도 이 ‘반야심경’에서는 물질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물질物質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을 말해보라면 허공虛空, 태양太陽,

대지大地를 들겠지요, 그런데 보는 놈은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봅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를 따로 봅니까? 보는 눈이 다릅니까? 다르다면 이것을

보는 눈은 쪼개 보아야 할 터인데 쪼갤 수 없다면 보는 눈은 하나 아닙니까!

 

하나인 이것을 견체[見體]라고 합니다. 제일 밝다고 하는 태양까지도 이 보는 견체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밤에는 태양이 없지요. 견체에 태양이 있는 것이라면 견체見體에 빛이 있어야 할 터인데 없기 때문에 밝은 대신 어둠을 보는 것입니다.

 


§ 이것이 곧 색즉시공色卽是空 이다.

 

세상에서 제일 밝은 것은 눈과 광명과 현실을 여의고 보는 것이 제일 밝다고 했는데, 어둡고 밝은 것이 둘이 없는 것이 제일 밝은 것입니다. 태양은 밝은 것이 있기 때문에 어두운 것은 못 나타내고 허공은 어둡기 때문에 밝은 것을 못 나타냅니다. 그런데 보는 놈은 어둡고 밝은 놈을 한꺼번에 나타내기 때문에 제일 밝은 것입니다.

 

이것은 어둡고 밝은 것이 둘이 없기 때문에 어둠을 대하면 어둠을, 밝음을 대하면 밝음을. 어둡고 밝음을 함께 대하면 함께 봅니다. 어둡고 밝음이 둘이 없다면 없는 것까지도 나타냅니다.

 

이 놈이야 말로 제일 밝고 제일 큰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은 법해法海 스님에게 ‘어떤 물건이 제일 크냐?’라고 물었을 때 ‘법성法性이 제일 크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가장 밝은가?’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것을 공부에 이용하도록 하십시오.

보는 놈을 보려면 화두話頭 소용없어요.

 

이것이 어떤 놈인가? 이것을 보는 것이 견성법[見性法]이지 다른 길 없어요. 화두 달라고 할 필요 없어요. 그래서 물질이 곧 허공이고 곧 허공이 곧 물질이라 하면 ‘반야심경’을 죽여 놓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허공이 아무리 크지만 제 이름자 하나 짓지 못하지 않습니까!

 

이들의 이름 하나 지어 불러주는 것이 법성[法性]입니다.
이 법성에는 허공, 태양이 둘이 없이 공한 것입니다.”

 

이때 겸우 선사는 법상法床에 주장자를 곧추세우면서

 

“잘 보시오.”

 

여기 주장자柱杖子를 보는 놈과 허공을 보는 놈이 따로 있습니까? 보는 놈 견체가 허공을 따로 보고, 주장자를 따로 봅니까? 주장자를 보는 견체見體나 허공을 보는 견체나 같지 않습니까!

마치 우리 눈으로 허공, 태양, 대지를 한 눈으로 같이 보는 것과 같이, 보는 견체見體는 같은 것입니다. 쪼개려고 해야 쪼갤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보는 견체見體에는 허공을 보는 놈이,

곧 이 주장자柱杖子를 보는 놈입니다.

 

보는 놈에는 허공과 물질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색이 곧 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色不異空 空不異色].

물질이 곧 공이라 하면 이 보는 놈[주인]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보는 놈]이 바로 자기 물건이며 이것을 보아야 견성이지 못 보면 견성 아닙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

 

여기서 수는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소리[聞, 聞體]의 경우를 예로 드신다.

 

소리는 듣는 놈이나 소리를 안 듣는 놈이나 다르지 않아요. 소리를 듣는 놈이 곧 소리이고 소리가 곧 듣는 놈입니다. 냄새[香,臭]도 그래요. 냄새를 맡는 놈이나 안 맡는 놈이나 둘이 아니요, 생각하는 놈과 생각하지 않는 놈 역시 둘이 아니요, 맛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맛보는 놈이 각각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딪치면 아픈 놈, 아플 때 그놈, 그놈이 그놈 아닙니까! 생각 일으킬 때, 안 일으킬 때 역시 같은 놈입니다. 생각이란 생각 없던 데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고 생각을 여의면 본래 생각 없던 그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니 생각 있던 놈과 생각 없던 놈이 둘이 아닙니다.

 

 

§ 이것이 불생불멸인 공空한 놈이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사리자여, 세상의 모든 법도 공하여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더럽고 깨끗함도 없다.

 

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없기 때문에 남도 없고[不生] 멸함도 없어요[不滅]. 없는 것에 어찌 남이 있고 멸함이 있겠어요. 모양 없는 허공에 어찌 남이 있고 멸함이 있겟습니까! 자 이것도 비유를 들어봅시다.

 

 태양은 하나입니다. 태양은 이 세상 온갖 유정[有情, 생명이 있는 것] 무정[無情, 생명이 없는 것], 삼라만상을 나투지만 태양빛 자체에는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기 때문에 생멸이 없다는 것입니다. 태양광太陽光 자체가 생멸하는 것 보셨어요?

 

 밤에는 태양빛이 없어진 것 같지만 지구 반대쪽에 있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다.


또 태양빛 자체를 더럽힐 수 있겠으며, 더럽힐 수 있는 자 있겠어요! 그러니 공한 상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더럽고 깨끗함이 없다]입니다. 허공, 태양, 모두 더[增]하고 감[減]함이 있겠습니까! 태양과 허공을 보는 견체에는 더하고 감함이 없습니다. 하기야 태양도 계속 활동하여 변화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비유로 든 것입니다.

 

 是故 空中無色
 시고 공중무색

 

 그런 고로 없는 데는 색이 없는 것이니

 

공중무색이란 공 중에 색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허공 속엔 삼라만상도 없다고 해야 할 것 아닙니까! 허공과 삼라만상을 보는 자성自性에 있는 자성 진공眞空을 말합니다. 보는 눈에는 한 모양도 없는 그놈, 소리 듣는 귀에는 한 소리도 없는 그놈, 냄새 맞는 코에는 한 냄새도 없는 그놈, 맛을 보는 혀에는 한 맛도 없는 그놈, 이 모두 하나도 없는 공[空]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 공을 여러분들이 모두 갖고 여기 앉아 있어요! 지금 여기 법당에서는 맛도 종소리도 없으니 그 공을 여러분이 다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자성공[自性空] 속에는 색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색이 없을진데 어찌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있겠어요. 그러므로 무수상행식이 되는 것입니다.

 

無受想行識
무수상행식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알음알이를 내는 일도 없고
 눈으로 보이는 세계도 없고 보이지 않는 의식의 세계도 없다.

 

 지금부터는 무자가 계속 나오는데 한 마디로 끝낼 수 있는 것을 중생들이
 한 마디 갖고는 알아듣질 못하니까 자꾸 이름을 지어 보이는 것입니다.

 

 선사께서는 청법 대중에게 거듭거듭 말씀하시고는,


나도 여러 말을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육근[六根: 눈, 귀, 코, 입, 몸, 뜻]도 없고
 육근 경계[모양, 소리, 향, 맛, 촉감, 생각]도 없는 것이니

 

하열한 근기는 상[相]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여기로 들어가기 힘들어요. 그러나 우리 앞에서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모두 공과 다르지 않고 본래 없었던 것이라는 , 본래 없는 그 자성自性을 갖고 있다는 것, 그것과 꼭 같은 도리입니다.

 

여러분, 이 몸뚱이는 이 시간 있다가 다음 시간에는 보증할 수 없는 물건 아닙니까! 조존석망[朝存夕亡 아침에는 있다가 저녁에 없어짐]이라, 우리의 생명이 짧든 길든 간에 이 세상 나오기 전에 이 몸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대중을 둘러보시더니,
 “아니, 전 교수가 내 목전에 앉았네!”

 선사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하시는 말이다. 나는 선사의 설법을 녹음하느라고 석유난로

 뒤편에 앉아 있었으니 내가 안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사실 나한테 무엇을 물어올까 겁이 났다.

 

 “내 한 번, 전 교수한테 물어 봐야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이 몸이 간 후에는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이 세상 떠나기 전과 이 세상 떠난 후의 것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습니다.”

 

 선사는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보면 천만 년을 가도 안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만 번 죽어도 이 놈은 없어지지 않는 놈이요. 이것을 보여 주자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이것을 못 보면 불법 만난 보람이 없습니다. 이것을 각자 찾아 가지면 이 세계가 천지개벽을 몇 번을 해도 이것은 없어지지 않아요.

 

 천지개벽天地開闢, 대천이 구괴[大天具壞우주의 멸망]할 때 이 몸이 주 할 곳을 찾아 놓아야만 불법 만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대천구괴 할 때 자기의 주처住處[머물 곳]가 없다면 무량겁이 다하도록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이 말입니다.

 

불법이란 이렇게 깊고 깊은 것이며, 얕다면 바로 자기가 보는 곳에 있어요. 그 얕은 곳이란 일념불기처[一念不起處]입니다. 안이비설신의 무안계무의식계에도 있습니다. 이 몸은 사대[地水火風]로 이루어진 것, 육진신식주본래공六塵身識住本來空[안이비설신의가 머무는 곳이지만 본래는 없는 것]이라.

 

  

無無明亦無無明盡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역무무명진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어 죽음도 없고 노사가 다함도 없으니

 

 “어둠도 밝음도 없는 것이 가장 밝은 것이라(어둠과 밝음을 함께 보는 것)
  앞서 말하지 않았어요!”

 

 선사가 석남사 대각전에서 설할 때는 보다 구체적으로 설하셨다.

 

 사실『반야심경』에는 무명진無明盡이라 했지만 암[暗]자를 하나 더 넣어서 무명암무무명암진[無明暗 無無明暗盡]이라 하여야 정확합니다. 태양이 지고 어두워지면 그 어둠을 보는 놈이 있으니 의당宜當 밝음과 어둠을 함께 말해야 합니다.

 

늙음, 늙어 죽어 다함도 없다. 사람이 꼭 늙어야 죽습니까! 젊어서 죽기도 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죽는 사람도 있고, 아예 어머니 뱃속에서 죽는 사람도 있으니 무생노사[無生老死]라 해야겠지요. 노사가 없는데 무슨 고집멸도[苦集滅道]가 있겠는가! 이 말입니다.

 

無智亦無得
무지역무득

 

지혜도 없고 얻을 지혜도 없다.

 

“가장 밝음이 자성인데 자성은 이미 각자 갖춰져 있는 것,

 어디 밖에서 구하랴.”

 

以無所得故
이무소득고

 

본래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앞서 달마가 혜가에게 이른 말을 기억하시지요.’라고 하시면서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으로부터 법을 구하고자 할 때 ‘네 속에서 구하라’는 말씀을 상기시키셨다.

 

 

§ 본래무일물 이란 말이 이것입니다.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 六門]에 대하여 좀 더 설할 것이 있습니다. 육조 스님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하신 말씀이 불자佛子들에게 도무지가 통하지가 않아요. 육조 스님의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설명하여야겠어요. 안의비설신의 육문에 본래무일물을 합일[合一]시킬 수 있어요

 

본래무일상[本來無一相], 본래무일성[本來無一聲], 본래무일미[本來無一味],
본래무일촉[本來無一觸], 본래무일법[本來無一法]이 있습니다.

 

눈으로 삼라만상을 다 보나 눈 감으면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 본래무일상[本來無一相]입니다. 귀로 듣던 온갖 소리 여기 법당法堂에 오니 차 소리도 없지요. 여기 지금 설법하는 내 소리마저 없으면 한 소리도 없지 않아요. 이것이 본래무일성[本來無一聲]입니다.

 

향, 맛, 생각 모두 똑같은 이치입니다. 향, 맛, 생각하는 놈에는 본래무일물, 본래 없던 것, 이것을 보면 견성見性입니다. 다른 것 없어요. 화두 갖고 참선하려고 수고 할 것도 없어요. 그래서 나는 오늘 이 『반야심경』은 견성시키는 경이라고 자신을 갖고 설했는데 알아 들으셨는지? 

 

지금은 음식을 먹지 않으니 한 맛도 없는 본래무일미[本來無一味]요, 내 몸을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본래무일촉[本來無一觸], 또 경계에 따라 한 생각도 안 일으키면 본래무일법[本來無一法]입니다. 이렇게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에도 본래 무일법이 있어요.

 

육조 스님은 이것을 통해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않고 심지어 반대하는 사람까지 있어요. 반대하는 사람만 없어도 잠자코 있겠는데 이것을 못 본 사람은 그대로 넘어가겠지만, 이것이 자기 물건이고 중생의 물건이며 동시에 제불諸佛의 물건인데 어찌 그대로 묻어두겠느냐 말입니다.”

 

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귀일 일귀하처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 화두를 몇 번을 설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 각자의 안이비서신의

 만법귀일처[萬法歸一處]가 만법출생처[萬法出生處]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눈을 떠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보면, 이것이 만법萬法 아닌가요! 눈 한 번 감으면 모든 것 없어지고 보는 견체見體로 돌아가지 않나요!. 또 눈 뜨면 다시 삼라만상이 나타나지요. 이것이 만법출생처[萬法出生處]라!.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 가깝습니까!

 

듣는 소리도 귀만 열면 온갖 소리 다 들리다가 귀만 막으면 한 소리도 없고, 본래 듣는 놈으로 돌아가니 만성귀일처[萬聲歸一處]요, 코로 온갖 냄새 다 맡다가 코만 막으면 한 냄새도 없이 냄새 맡는 그놈으로 돌아가니 만향귀일처[萬香歸一處]요, 다시 코를 열면 온갖 냄새 다 나니 만향출생처[萬香出生處]라.

 

먹는 것도 같아요. 먹을 때는 온갖 맛이 다 있는데 입 다물면 한 맛도 없고 맛보는 놈으로 돌아가고 음식을 씹으면 온갖 맛이 다 생기니 만미귀일처[萬味歸一處] 만미출생처[萬味出生處]라.

 

[觸]도 만촉귀일처[萬觸歸一處] 만촉출생처[萬觸出生處]입니다.

 

[法]도 그래요, 한 생각 없는 일념불기처에 들어가면 한 법도 없는 것 아닙니까! 일념불기처에 들어가면 육근六根으로 설한 만법귀일처가 일념불기처[一念不起處]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상대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것이니 만법출생처萬法出生處이며,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의 그곳이 일념불기처, 만법귀일처萬法歸一處입니다.

 

                              

§ 열반은 영원한 삶을 말한다.

 

無所得故 菩提薩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罣碍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니

 

많은 분들이 열반涅槃을 죽었다는 말고 알고 있는데 불생불멸의 영원한 생명체를
얻는 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천상의 달 하나에 비유한 바 있지요.

 

 이 열반체涅槃体를 체득하고 보면 생사열반生死涅槃이 상공화常空和(하나가 됨)
 되는 것입니다. 천상天上의 달은 열반체이고 천강월千江月은 생멸처生滅處입니다.

 

비유를 들지요. 천상의 달을 여의고는 물 속의 달이 안 나타나니 생멸生滅이 있는 물 속의 달과 생멸이 없는 천상의 달과 생사거래가 상공화常空和아닙니까! 과거 현재 미래를 지배하는 태양 자체는 생멸이 없는 것이나 단지 자전自轉하는 지구地球에 따라서 뜨고 지는 생멸이 보이니,

 

생멸 없는 태양 없이는 어둠과 밝음의 생멸이 없지 않아요!

파도의 경우 바닷물은 열반체요, 파도는 바람 따라 생멸하는 것,

바다 없이 파도 있겠소? 서로 상공화常空和 아닙니까!

 

날마다 출몰出沒하는 태양도 자전하는 지구에서 보기에는 생멸이 아닐 수 없지만

태양 자체는상주 불멸하는 열반체[佛性]이니 이것 또한 생사열반 상공화입니다.

 

여러분! 각자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바깥 경계境界가 생멸하나 보는 놈은 생멸이 없지요.

여러분 자체는 열반체요, 보는 놈과 삼라만상은 상공화常空和입니다.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이 모두 상공화常空和입니다.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 般若波羅密多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 반야바라밀다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심경>에 의지하여 성불하였다.

고로<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더 할 수 없는

주문이며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주문으로 진정 모든 고액을 없애주느리라.

고로 <반야바라밀다 주>를 설하노니<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모두 보는 자기自己의 자성自性을 보아 깨달으신 것입니다.

거듭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반야심경』이야 말로 바로 알고 깨치면 부처가 되는 경입니다.

                              

 

§ 불자들에게 당부當付

 

선사는 '반야심경'의 해설을 마치시고는,

 

앞으로 한마디 부탁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는 일생 동안 환갑, 진갑잔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모르고 토굴 속에서 지내고 있는데 작년에 생각해 보니 ‘앞으로 이제 갈 날은 가까운데 생일이나 좀 알리고 생일법공양生日法供養을 한 번 시키고 가야겠다’ 해서 작년에 알렸지요. 올해도 안 나온다고 했지요.

 

내 생일 대신 저 양로원養老院에 가서 공양 한 번 올려라 했지요. 그런데 각지에서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만나야 한다고 해서 오늘 나왔어요. 중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영원한 생명을 찾으려고 출가한 몸인데 생일잔치를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가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내 출가날입니다.

 

음력 2월8일 당시 29세 때 가족을 버리고 배낭 하나 걸머지고 산 속으로 들어갔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부처님 출가도 29세 2월 8일로 같아서, 아마 내가 불교와 인연이 있나 보다 했지요. 나는 부끄럽지만 그래도 이런 말 해 주는 스님도 흔치 않아 나와서 한마디 한 것입니다.

 

이치理致를 알아들었으면 각자 자기 공부를 해야지 귀동냥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오시지 말고 자기 집에서 본래면복本來面目을 찾는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선사께서 다시 게송을 읊으신다.

 

空手來 空手去 百年貪物一朝塵 今聞一法 無價寶
공수래 공수거 백년탐물일조진 금문일법 무가보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 백 년 동안 탐하여 쌓은 것
아침 이슬과 같고, 오늘 들은 한 법은 값을 치를 수 없는 보배니라.

 

이 세상에 올 때 누구 하나 한 물건이나 갖고 왔습니까?
갖고 온 것 있으면 여기 대중大衆 앞에 내놓아 보시오.

 

이 몸뚱이도 없었고 한 생각 무명업장(無明業障 어리석은 행)을 일으켜 부정모혈(父精母血 부모님의 정자와 난자)의 시주를 얻어 가지고 나온 놈, 그러니 이 몸 까지도 자기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상 떠나갈 적에는 자기 집에 온갖 보화寶貨 가득히 쌓아 놓아도 한 물건도 갖고 가지 못하잖아요.

 

은행銀行에 몇 천만, 몇 억 원 있다 해도 갖고 갈 수는 없잖아요. 자기 가족도 따라나설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따라나선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요즘 사람들 보면 뭐하러 탐심貪心부리는지 모르겠어요.

 

여기 교수님도 있으니, 자기 월급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그것도 학생들 덕분에 이렇게 이 자리에서 밥 벌어먹는다고 고마운 생각을 가져야지. 그 이상 탐욕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백년탐불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라. 100년한 것 하루아침의 먼지요, 이 몸 갈 적에 먼지만 남기고 가지만 오늘 들은 이 일법一法(반야심경 설법)은 세세생생 무가보無價寶(값을 칠 수 없는 보배)입니다.

 

여러분! 허공, 태양, 대지를 얼마로 값을 칠 것입니까? 서울서는 땅 한 평에 천만 원대를 호가呼價하는 곳이 있다던데 이 지구를 통째로 줄 테니 이 몸 하나와 바꾸자면 바꿀 수 있겠습니까! 자기 몸뚱이가 제일 소중한 것입니다. 허공, 태양. 태지 이 모두를 한꺼번에 다 준다고 해도 이  『반야심경』과는 못 바꿉니다. 그러니 오늘 설한 이 법문은 무가보[無價寶]입니다.

  

        

 

§ 꽃 한 송이씩 드립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께 세계일화世界一花, 꽃공양을 하려 합니다.
부처님 당시도 1,200대중에게 꽃공양[花供養]을 보여 주었어요.

 

一光이 呑眼光이니 森羅萬象이 眼中花라

안도일광     탐안광        삼라만상   안중화 
世界一花가 開眼中이니 眼光無處에 不開花라

세계일화   개안중         안광무처    불개화

 

눈 빛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담기니 삼라만상이 눈 속의 꽃이라,
세계일화란 이름의 한 송이 꽃이 눈 속에 펼쳐지는데
이 눈빛 닿지 않는 곳에는 꽃이 피지 않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이 눈동자 속에 들어 있어요. 세계일화世界一花를 지적하라고 하면 무엇이겠어요? 삼라만상을 낳게 한 태양 광명光明이 아니겠어요. 이 태양까지도 눈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눈만 뜨면 각자의 안광眼光속에 다 있는 것입니다. 춘하추동 언제나 눈만 뜨면 핍니다.

 

안광무처불개화 眼光無處 不開花[눈 빛이 닿지 않는 곳에 꽃이 안 핀다]라. 어떤 이는

춘광무처 불개화 春光無處 不開花[봄볕이 닿지 않는 곳에 꽃이 안 핀다]라 했지만,

요새 겨울에도 꽃피는 곳, 화원 같은 곳이 있는데 그런 꽃은 서리만 맞아도 죽고

폭풍우 만나면 쓰러집니다.

 

내가 내놓은 이 꽃은 어떠한 서리도, 폭풍우도, 해녀들이 바다 속 깊이 갖고 들어가도 바닷물마저도 적실 수 없는 꽃이요. 바다 속에서도 피는 꽃 한 송이를 제공하니 이 꽃 받아가지고 가서 세세생생世世生生 버리지 말아야 해요.

 

왜냐하면 집에서 가꾸는 꽃도 만물의 영장靈長인 사람만이 가꿀 수 있지 짐승이 가꿀 줄 압니까? 그러니 화분花盆 깨지면 다른 것으로 갈아서 꽃을 옮겨 심어 다시 가꿀 수 있듯이 이 세계일화인 각자의 자성自性은 이 몸 화분이 깨져도 내생來生에 또 태어나서 그 자성의 꽃을 가꿀 수 있는 그런 화분이 되라 이것입니다.

 

나는 오늘 이런 화분에 이런 꽃, 세계일화世界一花 한 송이를 심어 드리는 것입니다.

 

선사는 세 번이나 꽃을 심어 주었음을 확인하신다.

우리 청법대중은 꽃 한 송이씩을 받아갖고 법당을 나섰다. 
                                                                                        

                                                


출처 : 숲속의 청곡산방
글쓴이 : 청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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