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선시

[스크랩] 三流人生의 自覺

by 慧明花 2012. 10. 2.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앞선 많은 성인(聖人), 성현(聖賢)들께서 경전(經典), 저서(著書) 등을 통하여
명쾌한 답을 주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현상(現象)의 세계(世界) 즉
감각론(感覺論)적 사고방식(思考方式)의 세계에 집착(執着)하여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세계에 말씀에서 멀어져 있을 뿐입니다.

현시대(現時代)라 해서
달리 새롭게 말할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미 수 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眞理)로 상세하게 설명을 해놓으셨습니다.

인간의 참된 모습은 육체를 조정하는
"마음" 즉 "영적생명(靈的生命)"입니다.

우리가 무의식(無意識)중이거나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 육신(肉身)의 모든 기능(技能)은
변함없이 대자유(大自由)의
대조화(大調和) 속에서 진행(進行)되고 있는바, 어떠한 요구(要求)나 강요(强要)도 없는 속에
스스로 생장(生長) 혹은 목숨,
또는 인간이라 칭(稱)한다면,
인간이란
영묘(靈妙)한 에너지의 파동(波動)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
쉬임없이 흘러 지나가는 육체(肉體)만으로는
참다운 인간이라 하기에도,
또 참으로 존재하는 실재(實在)라 하기에도
부족함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총체적인 의식(意識)도
대략 다음의 세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적어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感覺)의 범위에서는 벗어나 있는,
영원불멸(永遠不滅)하며,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무애자재(無碍自在)하며,
대자대비(大慈大悲) 하다는,
불성(佛性)이나 신성(神性) 또는
본성(本性) 등으로 표현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둘째는
현재의 의식(意識)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즉 현재의식(現在意識)의 망각화(忘却化)된
부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라는 마음이 있으며,

셋째는
지금 의식하고 감지하는 인간이
"느낀다", "감지한다"는 등의
현재의식(現在意識)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산(計算)하고,
계획(計劃)하고,
노력(努力)하는 모든 분별심(分別心)이
바로 이 현재의식(現在意識)인 것입니다.

즉 사람 개개인 모두가
지식(知識)이나 학식(學識), 상식(常識) 등으로 결집된 알고 있다함의 모든 것과,
기억(記憶)하고 있다함의 모든 부분이
바로 이 현재의식(現在意識) 또는
분별심(分別心)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인류역사 이래로
대부분의 인간이
모든 가치(價値)와 판단(判斷)의 기준을,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바로 이 현재의식(분별심)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만,
이 분별심이라하는 현재의식도
인간의 의식(意識)을 구성(構成)함에 있어서
극히 한정적(限定的)인
한 부분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달리 말하면
현재의식(분별심)이 작동이 되지 않는 상태,
즉 무의식(無意識)이거나
잠자고 있는 동안은
자신의 육체가 손이나 발 등이
몇 번이나 움직였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의식(意識)이라는
전원(電源)을 넣었을 때는
작동(作動)이 되지만,
전원(電源)이 끊이면 멈추어 버리고야 마는
극히 부분적인 일부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귀로, 코로, 감각으로,
즉 자신의 분별심(分別心)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만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信賴)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생명(靈的生命)이라고 불리우는 본마음,
본성(本性)은
죽지 않고, 썩지 않고, 멸(滅)하지 않으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히 살아가는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생명(生命)임을 인식하셔야만 합니다.

자연(自然)의 섭리(攝理) 안에서
자유자재로 뻗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生命)이며, 목숨이며,
인간(人間)인 것입니다.
곧 인간은
육체(肉體)라는 옷을 입고 있는
영원불변의 신(神)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 속의 본성(本性)이며,
부처님이 자신속의 본성(本性)이며,
이 우주의 창조주(創造主)가
자신 속의 본성(本性)이라는 것을
자각(自覺)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부모(父母),
형제(兄弟), 처자(妻子), 이웃 등,
모두가 각자 독립된 개체로서의
성신(聖神)이면서,
내면(內面)의 참 모습은
자타(自他)가 일체(一體)입니다.

더불어 우주생명(宇宙生命)과
하나인 일체(一體)인 것입니다.
백천만겁(百千萬劫)을 지나오며
우리 인간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여건(與件)과 환경(環境)으로
살아오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부부(夫婦)로, 형제(兄弟)로,
부모자식(父母子息), 이웃 등으로
맺혀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내면(內面)의 참 모습은
나와 남이 없고 모두가 하나인 것입니다.
자신의 본성(本性) 외에 달리,
육체인간의 모습이었던
성인(聖人)이나 어떠한 물체(物體)에
기도(祈禱)하여 복(福)을 구(求)한다던가,
고통(苦痛)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함은
진리(眞理)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행위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偶像崇拜)입니다.

자신의 본성(本性)외에
달리 절대신(絶對神)을 찾아
기도(祈禱)하는 것은 미신(迷信)입니다.
또한 인간 본연(本然)의 신성(神性)을
스스로 은폐(隱蔽)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각 개체(個體)는
이미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고 왔습니다.
그러나 육체(肉體)라는 옷을 입고부터
육체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즉 육체적인 감각(感覺)에만 의존하다보니,
이 세상에 온 참 목적을
망각(忘却)하게 된 것입니다.
해서 그 참 목적을 다시 찾아
그에 부합(符合)되는 삶을 살도록 하려고,
석가(釋迦)께서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는
없다고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의 육체의 행위로는
의(義)를 결코 실현할 수 없다"고 강조하시고, 당신의 육체
즉 당신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십자가에 못박으면서까지,
인간이 자신의 참 모습을 찾아서
자유(自由)와 평화(平和)와 사랑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참 모습은
육체(肉體)가 아니라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영(靈)입니다.
형태(形態)를 가지고 있는 모든 물체(物體)는
반드시 그 시작과 끝남이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 또한 틀림없이
조만간 사라질 물거품 같은 것입니다.
성경(聖經)에도
"살리는 것은 영(靈)이요,
육(肉)은 무익하니라" 했습니다.

반드시 종말(終末)이 있는
유한(有限)하고 무익(無益)한
육신(肉身)만을 위해 살아서는
결코 참 행복이 오지 않습니다.
육신(肉身)이나 물질(物質)로 인한
모든 문제는 본래부터 없는,
허상(虛像)일 뿐이므로 끝이 없으며
진정으로 해결할 길은 없습니다.

육신을 비롯한 일체의 문제를
영적인 차원, 마음의 차원에서
시작하고 또 맺을 때,
모든 문제가 이루어지고
또 해결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온 목적은
영적(靈的)인 생명(生命)의 진화(進化)를 위한
학습(學習)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현세(現世)에 태어나서 누구를 만나,
또 어떻게 영적생명(靈的生命)의
진화(進化)를 위한 학습을 하겠다는
전생(前生)의 계획아래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진화(靈的進化)에
적합한 학습을 하려고,
인간은 모든 것은 스스로 선택해서 왔습니다.

부모, 형제, 처자, 이웃 등
모두 스스로가 선택해서 온 것입니다.
자신의 하고자함에 관계없이
어떠한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어떠한 환경, 어떠한 여건에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한 것입니다.
어떠한 부모를 만나든,
어떠한 사람, 어떠한 환경과 여건이든 간에
결코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자신의 상대가 누구이든,
또 어떠한 일이든,
자신의 영적(靈的)인 진보(進步)와
진전(進展)을 위해서,
학습을 할 목적으로
스스로가 선택해서 왔기 때문에,
인연(因緣)되어 만나는 모든 이에게
진실로 깊이 또 당연히 감사해야만 합니다.

만물(萬物)은
지금 보이는 모습으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 역시
입체적(立體的)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도 전생(前生)과 현세(現世),
그리고 내세(來世)가 있습니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전생(前生)을 거쳐 윤회(輪廻)하며 이어져 오고 있다고
석가(釋迦)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구원실성(久遠實成)"이라
"시작 없는 처음부터 완전히 이루어져 있다."
고 하십니다.

예수 또한 이 천년 전의 예수가 아니라
"나는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느니라.
요한이 구 시대의
선지자(先知者) 엘리야의 영(靈)이니라"
고 말씀하시며,
모습과 환경(環境), 여건(與件) 등은 다르지만, 인간의 참 모습인 영적생명(靈的生命)은
영원한 삶의 수레바퀴를
돌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각자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모든 일들은,
전생(前生)에 이미
그럴만한 인연(因緣)이 있었거나,
혹은 내세(來世)의
지금의 또 다른 어떠한 인연(因緣)을 위해
지금 마주하고 있음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이런 연고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우연(偶然)이란
단 하나도 없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은 경쟁(競爭)상대,
투쟁(鬪爭)대상 혹은
자신에게 엄청난 충격(衝擊)을 주고,
피해(被害)를 주는 것같이
느껴지는 사람도 알고 보면
자신의 영적(靈的)인 진화(進化)를
도와주는 은인(恩人)이며,
전생(前生)이나 내세(來世)에
이미 그렇게 할만한
분명한 이유(理由)와 의미(意味)를 가지고,
현재의 자신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 만나는 모든 사람과
대(對)하는 모든 일들이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所重)한 사람이고, 가장 귀(貴)한 일임을 아셔야만 합니다.

하물며
함께 살아가는 부부(夫婦)는
그 인연(因緣)이 얼마나 고귀하고
대단한지 모릅니다.
약 60억개의 구슬 속에서
한 알은 검정색을,
또한 알은 흰색을 칠하여
한 상자 속에 넣고 흔들어서
짝이 되도록 하려는
확률(確率)이라고 들 합니다.
이 소중한 만남,
이 소중한 부부로서의 생활을
작은 마찰(摩擦)과 갈등(葛藤)으로
손상시켜서야 말이나 되겠습니까?

학습하려고 온 현상(現象)의 세계는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이 짧은 시간을 가짜의 헛 모습에 현혹(眩惑)되어, 어둡고 힘들게 보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무릇 인간이 이 세상에 올 때에는 그 어떤 부조화(不調和)라도 모두 조화롭게 할 수 있는 힘을 분명히 가지고 왔음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괴롭고 고달픈 일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임을 인식하십시오.

인간이 이 세상에 온 목적(目的)은 결코 부귀영화(富貴榮華)나 권력(權力)을 탐(貪)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열심(熱心)히 또 충실(充實)히 사는 동안에, 그 정성(精誠)과 노력(努力) 속에서 파생(派生)되는 부귀영화(富貴榮華)나 권력(權力)조차도 무조건 나쁘다든지 무조건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귀영화(富貴榮華)나 권력(權力) 등이 삶 그 자체의 목적(目的)이 되어서는,

 인생의 참 목적이 그 가치(價値)와 의미(意味)를 잃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인(聖人)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그 시대의 시세(時勢),

즉 현상(現象)의 세계에 타협했더라면 권력은 물론 부귀영화도 당연했겠지만 조금의 미련도 없으셨습니다.

자신의 주변(周邊)과 환경(環境)과 여건(與件) 등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해도, 결코 좌절(挫折)하거나 낙심(落心)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은 전부 자신이 이겨낼 수 있는 학습의 자료임을 이미 알고 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해서 어려움이나 고통(苦痛), 재난(災難) 등 어두운 부조화(不調和)에 부딪힐 때마다 "틀림없이 해결할 수 있다." "이미 전부 해결(解決)되었다."생각하시고 조금도 주저함 없이 대처하십시오.

괴롭더라도 피하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자신이 놓여져 있는 환경(環境)이, 자신의 영적(靈的)인 생명(生命)을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영양소입니다.

자신의 영적(靈的)인 생명(生命)이 현재 놓여진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영양분(營養分)을 충분히 흡수했을 때, 더 좋은 다른 환경이 저절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이 되면 엄청난 영(靈)적인 진보(進步)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생명(靈的生命)이 이제는 구태여 어려움이 없이도,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충분히 숙지(熟知)하고, 진보(進步)와 진화(進化)가 이루어지겠다고 느끼는 시점이면 실로 어려운 일은 닥치지 않습니다.

비실재(非實在)의 모습인 현세(現世)는 오로지 자신의 영적진화(靈的進化)에만 소용되려고 자신의 앞에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靈)이 스스로도 진화(進化)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갖추어졌다 싶으면, 비실재(非實在)인 본래부터 없었던 고통(苦痛), 어두움, 재난(災難) 등의 부조화(不調和)는 자연히 소멸되고, 밝은 빛, 본태양(本太陽), 본성(本性)의 조화로움이 현상(現象)의 세계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본성(本性)의 나타남이라는 것은 곧 양(量)과 질(質)을 초월한, 모든 면에서 무한(無限)이라는 뜻입니다. 자체로 이미 전지(全智)요, 전능(全能)입니다.

본성(本性)의 나타남이란 곧 지금의 이 현상세계(現象世界)를 바로 지상낙원(地上樂園)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 본성(本性)의 무한(無限)한 모습을 깨닫는 것을 우리는 삶의 중심자각(中心自覺)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연(本然)에 대한 자각(自覺)이야말로 전 인류(人類)와 그 개개인생(個個人生)의 목적(目的)이요, 의미(意味)요, 참다운 가치(價値)일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절정(絶頂)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도달하기 위해 주변자각(周邊自覺)을 찾을 수 있는 육체 속의 방편(方便), 생활 속의 방편(方便)으로서, 마음의 법칙, 빛의 법칙, 말의 힘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그 자체로 이미 평등(平等)내지는 동등(同等) 또는 일체(一體) 등으로 표현됩니다.

꼭 "무엇이 선(先)이고 무엇은 후(後)이다"하는 것은 본래부터 없는 법입니다.

중심자각(中心自覺)이 오는 순간이 주변자각(周邊自覺)이 있는 순간이고 ,주변자각(周邊自覺)이 곧 중심자각(中心自覺)인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일체(一體)의 고통(苦痛)이나 재난(災難), 질병(疾病) 등 조화롭지 못한 어떠한 모습이라도,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또 영원히 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는 모든 일을 자신 속의 본성(本性)께 기도(祈禱)하는 습관을 키우십시오.

기도(祈禱)한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즉 바라는 모든 일을 본성(本性) 즉 자신 속의 부처님, 자신 속의 하느님, 자신 속의 절대신(絶對神) 등에 맡기는 것이 기도(祈禱)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본성(本性)에 일체(一體)를 맡긴다는 것도, 내면(內面)의 진정한 뜻을 정확히 모르면 무조건(無條件)적이고, 때로는 나태(懶怠)와 오만(傲慢)을 포함한 의존(依存)이나 의지(依支)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생명(生命)의 존재(存在)와 의미(意味), 가치(價値)를 확인할 수 있는, 우리들 삶 속의 모든 일들 중에, 바로 지금 자신 앞에 와있는 일에 대한 지극한 성실(誠實)과 열심(熱心)의 노력(努力)이 바탕되는, 그런 위임(委任)이라야 제대로 된 "맡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을 충실히 대처하고, 지금 하는 일에 최선(最善)의 노력(努力)을 기울인다는 것은, 모든 생명(生命)의 기본적인 자세일 뿐만 아니라, 그 존재(存在)함의 의미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오직 본능(本能)만을 따르는 뭇 생명이 아닌 유일하게 인간이라는 생명(生命)에게만은 "바로 지금"의 열심(熱心)과 성실(誠實)이, 틀림없이 알찬 과거(過去)와 밝은 미래(未來)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라는 시점(時點)의 가치(價値)를 모른다는 것은, 전(前)과 후(後)를 포함해서 영원토록 자신의 생명(生命)적 존재(存在)에 대한, 어떠한 가치(價値)나 의미(意味)도 기대(期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육체, 오장육부(五臟六腑)를 만드시고,

 자신을 살리시는 영원한 생명(生命)인 본성(本性)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먼저 알고 계십니다.

자신의 몸, 오장육부(五臟六腑) 어느 부위든 이상(異狀)이 생길 경우, 자신을 만들고 자신을 살리시는 본성(本性)만이, 누구보다 또 어떠한 물질(物質)에 앞서, 가장 수리(修理)나 정비(整備)를 잘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생명본연(生命本然)이 지니고 있는 무한(無限)의 자연치유력(自然治癒力)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 뜻을 고맙게 여기시고, 스스로를 존중(尊重)하고, 섬기고, 사랑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生命)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거룩함을 자각하셔야 합니다. 무엇에 앞서 진정으로 자신을 소중할 수 있을 때라야 남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연(因緣)은 자신의 영적진화(靈的進化)를 위한 학습자료로서 스스로가 선택해 왔으므로 주위의 어떠한 환경(環境)과 여건(與件)도 고맙고 감사히 맞으십시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것임을 이미 알고 왔으므로, 조금도 두려워 마시고 자신있게 대(對)하십시오.

자기 주변 모든 사람과 모든 일들이 바로 자신을 살리고 자신의 영적생명(靈的生命)을 성장시켜 주는 은혜로운 사람들이며 축복받은 이들입니다. 외면하거나 피하지 말고 적극적인 자세로 수용하십시오. 어떠한 잘못이라도 인정(認定)과 긍정(肯定)의 사랑으로 감싸 무한포용(無限包容)으로 마음을 키우고, 감정(感情)을 성숙시켜, 훌륭한 영적생명(靈的生命)으로 성장(成長), 진화(進化)하십시오.

가벼운 예(例)입니다만 시계(時計)의 참 목적은 정확(正確)한 시각(時刻)의 나타냄입니다. 치장(治粧)의 화(華), 빈(貧)이 좋고 나쁨을 떠나 참 목적(目的)은 아닙니다.

아무리 화려한 고급소재(高級素材)를 사용하여 만들어도, 움직이지 않거나 부정확(不正確)할 때는 그의 참 가치(價値)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투박하고 값싼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하더라도, 정확하게 잘 움직이면 그의 할 일은 제대로 한 것이겠지요.
이렇듯 우리 인간도 이러한 인생의 참 목적을 알아야 하며, 또 이를 깨달을 때에 진정한 목표(目標)에 이를 수 있는, 참 자유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自由)란 어떠한 일에도 순조롭게 적응하여 조화(調和)를 이루는 것이며, 방종(放縱)이나 특정한 이익(利益)을 위한 제멋대로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

비행기나 새는 공기의 법칙에 순응(順應)하기 때문에 자유로이 날 수 있고, 물은 그 흐름에 충실히 따르기 때문에 막힘없이 흘러갑니다. 그렇다고 비행기나 새, 또는 물 등이 그 흐름의 법칙에 구속(拘束)되었거나 억압(抑壓)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법칙(法則)에 순응(順應)하고 질서(秩序)에 따르는 것이, 참 자유이고 자율(自律)이며, 허상(虛像)인 가짜의 자신을 묶어놓고 본성(本性)인 자신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매일매사(每日每事)에서 신비감을 찾아보시고, 그 신비로움에 감격해 보십시오. 자연의 섭리(攝理)는 오로지 오묘(奧妙)함과 신비(神秘)로움 뿐입니다.

실로 인간을 포함한 살아있는 모두의 그 생명(生命)과 삶은, 오로지 신비로움에의 감탄(感歎)일 뿐입니다. 범사(凡事)에 대한 감격(感激)과 감동(感動)이 나날이 기쁘게 하며, 순순간간(瞬瞬間間)을 새롭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좋은 글을 많이 접(接)해서 자신의 생명(生命)을 향상시키십시오.

잡다(雜多)한 독서(讀書)도 간접체험(間接體驗)에 의한 지식(知識)의 함양(涵養) 등, 좋은 면도 있는 반면에 잡다한 만큼의 저자(著者)의 기운을 접(接)하는 것이 됩니다.

성현(聖賢)들의 좋은 말씀들을 가까이 하여, 그 밝고 맑은 기운을 접(接)하십시오. 그 속의 무애자재(無碍自在)를 얻어, 즐겁고 건강하게, 참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실현시키며 삶을 이끌어 가십시오.

삶에 이끌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끌릴 수도 없음을 한시라도 잊지 마십시오.

출처 : 三流人生
글쓴이 : 醉月 원글보기
메모 :

'선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겸우선사 반야심경 강해  (0) 2012.11.24
[스크랩] 세계에서 가장 짧은 詩, 하이쿠  (0) 2012.11.17
驟雨不終日  (0) 2012.09.07
一切無有如佛者  (0) 2012.09.01
[스크랩] 고암스님의 묵언정진  (0) 2012.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