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으며,
이 문제에 대해서
현시대(現時代)라 해서
인간의 참된 모습은 육체를 조정하는
우리가 무의식(無意識)중이거나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첫째는
둘째는
셋째는
즉 사람 개개인 모두가
오늘날까지 인류역사 이래로
달리 말하면
의식(意識)이라는
영적생명(靈的生命)이라고 불리우는 본마음,
자연(自然)의 섭리(攝理)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 속의 본성(本性)이며,
자신의 부모(父母),
더불어 우주생명(宇宙生命)과
이런 연유로
자신의 본성(本性)외에
인간의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예수님은
인간의 참 모습은
반드시 종말(終末)이 있는
육신을 비롯한 일체의 문제를
인간이 세상에 온 목적은
부모, 형제, 처자, 이웃 등
지금 자신의 상대가 누구이든,
만물(萬物)은
인간에게도 전생(前生)과 현세(現世),
인간은
예수 또한 이 천년 전의 예수가 아니라
지금 각자가 만나는
이런 연고로
매 순간 만나는 모든 사람과
하물며
학습하려고 온 현상(現象)의 세계는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이 짧은 시간을 가짜의 헛 모습에 현혹(眩惑)되어, 어둡고 힘들게 보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무릇 인간이 이 세상에 올 때에는 그 어떤 부조화(不調和)라도 모두 조화롭게 할 수 있는 힘을 분명히 가지고 왔음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괴롭고 고달픈 일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임을 인식하십시오.
인간이 이 세상에 온 목적(目的)은 결코 부귀영화(富貴榮華)나 권력(權力)을 탐(貪)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열심(熱心)히 또 충실(充實)히 사는 동안에, 그 정성(精誠)과 노력(努力) 속에서 파생(派生)되는 부귀영화(富貴榮華)나 권력(權力)조차도 무조건 나쁘다든지 무조건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귀영화(富貴榮華)나 권력(權力) 등이 삶 그 자체의 목적(目的)이 되어서는,
인생의 참 목적이 그 가치(價値)와 의미(意味)를 잃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인(聖人)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그 시대의 시세(時勢),
즉 현상(現象)의 세계에 타협했더라면 권력은 물론 부귀영화도 당연했겠지만 조금의 미련도 없으셨습니다.
자신의 주변(周邊)과 환경(環境)과 여건(與件) 등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해도, 결코 좌절(挫折)하거나 낙심(落心)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은 전부 자신이 이겨낼 수 있는 학습의 자료임을 이미 알고 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해서 어려움이나 고통(苦痛), 재난(災難) 등 어두운 부조화(不調和)에 부딪힐 때마다 "틀림없이 해결할 수 있다." "이미 전부 해결(解決)되었다."생각하시고 조금도 주저함 없이 대처하십시오.
괴롭더라도 피하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자신이 놓여져 있는 환경(環境)이, 자신의 영적(靈的)인 생명(生命)을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영양소입니다.
자신의 영적(靈的)인 생명(生命)이 현재 놓여진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영양분(營養分)을 충분히 흡수했을 때, 더 좋은 다른 환경이 저절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이 되면 엄청난 영(靈)적인 진보(進步)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생명(靈的生命)이 이제는 구태여 어려움이 없이도,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충분히 숙지(熟知)하고, 진보(進步)와 진화(進化)가 이루어지겠다고 느끼는 시점이면 실로 어려운 일은 닥치지 않습니다.
비실재(非實在)의 모습인 현세(現世)는 오로지 자신의 영적진화(靈的進化)에만 소용되려고 자신의 앞에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靈)이 스스로도 진화(進化)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갖추어졌다 싶으면, 비실재(非實在)인 본래부터 없었던 고통(苦痛), 어두움, 재난(災難) 등의 부조화(不調和)는 자연히 소멸되고, 밝은 빛, 본태양(本太陽), 본성(本性)의 조화로움이 현상(現象)의 세계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본성(本性)의 나타남이라는 것은 곧 양(量)과 질(質)을 초월한, 모든 면에서 무한(無限)이라는 뜻입니다. 자체로 이미 전지(全智)요, 전능(全能)입니다.
본성(本性)의 나타남이란 곧 지금의 이 현상세계(現象世界)를 바로 지상낙원(地上樂園)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 본성(本性)의 무한(無限)한 모습을 깨닫는 것을 우리는 삶의 중심자각(中心自覺)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연(本然)에 대한 자각(自覺)이야말로 전 인류(人類)와 그 개개인생(個個人生)의 목적(目的)이요, 의미(意味)요, 참다운 가치(價値)일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절정(絶頂)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도달하기 위해 주변자각(周邊自覺)을 찾을 수 있는 육체 속의 방편(方便), 생활 속의 방편(方便)으로서, 마음의 법칙, 빛의 법칙, 말의 힘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그 자체로 이미 평등(平等)내지는 동등(同等) 또는 일체(一體) 등으로 표현됩니다.
꼭 "무엇이 선(先)이고 무엇은 후(後)이다"하는 것은 본래부터 없는 법입니다.
중심자각(中心自覺)이 오는 순간이 주변자각(周邊自覺)이 있는 순간이고 ,주변자각(周邊自覺)이 곧 중심자각(中心自覺)인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일체(一體)의 고통(苦痛)이나 재난(災難), 질병(疾病) 등 조화롭지 못한 어떠한 모습이라도,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또 영원히 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는 모든 일을 자신 속의 본성(本性)께 기도(祈禱)하는 습관을 키우십시오.
기도(祈禱)한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즉 바라는 모든 일을 본성(本性) 즉 자신 속의 부처님, 자신 속의 하느님, 자신 속의 절대신(絶對神) 등에 맡기는 것이 기도(祈禱)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본성(本性)에 일체(一體)를 맡긴다는 것도, 내면(內面)의 진정한 뜻을 정확히 모르면 무조건(無條件)적이고, 때로는 나태(懶怠)와 오만(傲慢)을 포함한 의존(依存)이나 의지(依支)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생명(生命)의 존재(存在)와 의미(意味), 가치(價値)를 확인할 수 있는, 우리들 삶 속의 모든 일들 중에, 바로 지금 자신 앞에 와있는 일에 대한 지극한 성실(誠實)과 열심(熱心)의 노력(努力)이 바탕되는, 그런 위임(委任)이라야 제대로 된 "맡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을 충실히 대처하고, 지금 하는 일에 최선(最善)의 노력(努力)을 기울인다는 것은, 모든 생명(生命)의 기본적인 자세일 뿐만 아니라, 그 존재(存在)함의 의미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오직 본능(本能)만을 따르는 뭇 생명이 아닌 유일하게 인간이라는 생명(生命)에게만은 "바로 지금"의 열심(熱心)과 성실(誠實)이, 틀림없이 알찬 과거(過去)와 밝은 미래(未來)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 오장육부(五臟六腑)를 만드시고,
자신을 살리시는 영원한 생명(生命)인 본성(本性)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먼저 알고 계십니다.
자신의 몸, 오장육부(五臟六腑) 어느 부위든 이상(異狀)이 생길 경우, 자신을 만들고 자신을 살리시는 본성(本性)만이, 누구보다 또 어떠한 물질(物質)에 앞서, 가장 수리(修理)나 정비(整備)를 잘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생명본연(生命本然)이 지니고 있는 무한(無限)의 자연치유력(自然治癒力)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 뜻을 고맙게 여기시고, 스스로를 존중(尊重)하고, 섬기고, 사랑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生命)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거룩함을 자각하셔야 합니다. 무엇에 앞서 진정으로 자신을 소중할 수 있을 때라야 남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연(因緣)은 자신의 영적진화(靈的進化)를 위한 학습자료로서 스스로가 선택해 왔으므로 주위의 어떠한 환경(環境)과 여건(與件)도 고맙고 감사히 맞으십시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것임을 이미 알고 왔으므로, 조금도 두려워 마시고 자신있게 대(對)하십시오.
자기 주변 모든 사람과 모든 일들이 바로 자신을 살리고 자신의 영적생명(靈的生命)을 성장시켜 주는 은혜로운 사람들이며 축복받은 이들입니다. 외면하거나 피하지 말고 적극적인 자세로 수용하십시오. 어떠한 잘못이라도 인정(認定)과 긍정(肯定)의 사랑으로 감싸 무한포용(無限包容)으로 마음을 키우고, 감정(感情)을 성숙시켜, 훌륭한 영적생명(靈的生命)으로 성장(成長), 진화(進化)하십시오.
가벼운 예(例)입니다만 시계(時計)의 참 목적은 정확(正確)한 시각(時刻)의 나타냄입니다. 치장(治粧)의 화(華), 빈(貧)이 좋고 나쁨을 떠나 참 목적(目的)은 아닙니다.
아무리 화려한 고급소재(高級素材)를 사용하여 만들어도, 움직이지 않거나 부정확(不正確)할 때는 그의 참 가치(價値)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투박하고 값싼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하더라도, 정확하게 잘 움직이면 그의 할 일은 제대로 한 것이겠지요.
이렇듯 우리 인간도 이러한 인생의 참 목적을 알아야 하며, 또 이를 깨달을 때에 진정한 목표(目標)에 이를 수 있는, 참 자유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自由)란 어떠한 일에도 순조롭게 적응하여 조화(調和)를 이루는 것이며, 방종(放縱)이나 특정한 이익(利益)을 위한 제멋대로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
비행기나 새는 공기의 법칙에 순응(順應)하기 때문에 자유로이 날 수 있고, 물은 그 흐름에 충실히 따르기 때문에 막힘없이 흘러갑니다. 그렇다고 비행기나 새, 또는 물 등이 그 흐름의 법칙에 구속(拘束)되었거나 억압(抑壓)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법칙(法則)에 순응(順應)하고 질서(秩序)에 따르는 것이, 참 자유이고 자율(自律)이며, 허상(虛像)인 가짜의 자신을 묶어놓고 본성(本性)인 자신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매일매사(每日每事)에서 신비감을 찾아보시고, 그 신비로움에 감격해 보십시오. 자연의 섭리(攝理)는 오로지 오묘(奧妙)함과 신비(神秘)로움 뿐입니다.
실로 인간을 포함한 살아있는 모두의 그 생명(生命)과 삶은, 오로지 신비로움에의 감탄(感歎)일 뿐입니다. 범사(凡事)에 대한 감격(感激)과 감동(感動)이 나날이 기쁘게 하며, 순순간간(瞬瞬間間)을 새롭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좋은 글을 많이 접(接)해서 자신의 생명(生命)을 향상시키십시오.
잡다(雜多)한 독서(讀書)도 간접체험(間接體驗)에 의한 지식(知識)의 함양(涵養) 등, 좋은 면도 있는 반면에 잡다한 만큼의 저자(著者)의 기운을 접(接)하는 것이 됩니다.
성현(聖賢)들의 좋은 말씀들을 가까이 하여, 그 밝고 맑은 기운을 접(接)하십시오. 그 속의 무애자재(無碍自在)를 얻어, 즐겁고 건강하게, 참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실현시키며 삶을 이끌어 가십시오.
삶에 이끌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끌릴 수도 없음을 한시라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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