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경기도방

[스크랩] 대승금강반야바라밀경(大乘金剛般若波羅蜜經)이란?

by 慧明花 2007. 2. 24.
대승금강반야바라밀경(大乘金剛般若波羅蜜經)이란?


금강경에는 한역본이 7가지 정도 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해도 상관없습니다만 가장 널리 읽혀지고 가장 간략하기 때문에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가지고 강의를 하겠습니다.

먼저 제목을 보면 <대승금강반야바라밀경>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대승금강반야바라밀경(大乘金剛般若波羅蜜經)....

대승(大乘), 큰 수레입니다. 큰 수레... 여기서 ‘대승’이라든지 ‘금강’이라든지 ‘반야바라밀’이든지 ‘경’이라는 말은 사실, 명칭은 다르지만 같은 <하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미 그 <하나>는 여러분에게 다 드러나 있습니다. 숨겨지지 않고 우리 모두가 이미 맛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맛을 아시는 분이라면 벌써 금강경을 다 설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름’을 따라다니고, 이름이 가리키는 ‘모양’을 따라다니고, ‘육체’에 갇혀 있고, ‘느낌’에 갇혀 있고, ‘생각’에 갇혀 있고, ‘욕망’에 갇혀 있고, 여러 가지 장애를 받아왔기 때문에, 그 <하나>가 무엇인지, <하나>라고 하는 말로 가리키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사실은 늘 맛 보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수많은 경전이 있는 것이고, 조사(祖師)스님의 가르침이 있는 것이고, 외람되지만 저 같은 사람이 여기 나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구업(口業)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제 스스로 볼 때 여러 가지로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제 말만 따라서 제 이야기만 듣는다면, 제 말 역시 오히려 이 <하나>의 참된 맛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를 하면서 늘 드리는 얘기입니다만, 제 말이 아니라 제가 정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거기’에 오직 관심을 집중하시고, 오직 ‘거기’에만 목말라 하시면서 제 말에 귀를 열어 놓고 계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제 말은 마치 스쳐지나가는 봄바람처럼 지나가면서 혹시 그 봄바람 가운데 어느 한 줄기 바람이 여러분 스스로가 이 <하나>의 참 맛을 보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대승’이란 말로써 이 <하나>를 이야기 하고 있는가? ‘대승’이란 큰 수레죠, 어느 정도 큰 수레냐? 이 이상 더 클 수 없는 수레입니다. 가장 큰 수레,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수레, 모든 것을 다 싣고 있는 수레,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무리 싣고 실어도 더 실을 수 있는 수레입니다.  그래서 ‘크다’는 말로써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크다’는 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클 수가 없이 큰 수레입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수레라는 것은 정해진 크기와 양이 있어서 작은 수레, 그보다 좀더 큰 수레, 그보다 더욱더 큰 수레... 이런 식으로 어느 정도 순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수레는 애초에 실을 수 있는 짐칸의 크기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실어도 다 채워지지 않는 그런 수레입니다. 그럼 이 수레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 ‘어디’ 있어서 그 모든 것을 싣고 다니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그 수레의 축(軸) 위에 발을 딛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수레의 손잡이를 내 손에 쥐고 있고, 내 스스로가 그 수레를 운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가깝게는 지금 “수- 레-”, “대- 승-” 이라는 이 말!
“대! 승!, 수! 레!”
당장 지금 이 말!
‘대승(大乘)’, ‘큰 수레’, 이 말에 그 모양 없는 큰 수레가 숨김 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제가 애초에 말씀드렸듯이 제 말의 진정한 뜻을 잘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머리로 헤아리라는 말이 아니고, 제가 정말 ‘무엇’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가? ‘거기’에 관심의 초점을 두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 수레는 내 손에서 ‘이렇게’(손을 펴고 오므리면서) 움직이고 있고, 내 입에서는 ‘이렇게’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눈 앞에서 끊임 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수레는 “수- 레-”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수레의 모양을 갖추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름만 수레입니다. 지금 이렇게 “수- 레-”라고 하는 말 자체에 이 수레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따라서 수레라는 말의 뜻을 쫓아가서는 이 수레를 손에 쥐고서도 보지 못하는 가련한 신세를 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수레를 맛 보았다면 “대- 승-”, “금- 강-”, “반야- 바라밀-”, “경-”, 이렇게 읽고 있는 이 자리에서, 내 손아귀에서, 내 귀에서, 내 눈에서, 그 수레의 움직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색깔로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소리로서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대승’, ‘금강’, ‘반야바라밀’, ‘경’이라는 글자를 볼 때, 그 소리를 들을 때, 그 수레는 이렇게,(팔을 흔들면서) 여기 지금 이렇게(손을 오무리며)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수레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양이 없다 하고, 그러면서도 이미 다 드러나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이런 의심이 부쩍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일어나는 의심, 그것조차도 이 수레가 실어 나르고 있는 것입니다. 내 눈 앞에, 내 귓전에, 내 손아귀에, 내 발밑에, 내 머리에, 그 무엇이 나타난다고 하더라고 모두 이 수레가 실어 나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것을 이 수레가 싣고 있기 때문에 ‘큰 수레’라고 하는 것입니다. 작은 수레와 비교해서 큰 수레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누가 저에게 귀신에 대해 물었는데, 그 귀신조차도 이 수레가 싣고 온 것입니다. 따로 귀신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수레에 실리지 않고는 귀신이 귀신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자기 수레에 귀신을 싣고 다니면서, 귀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내 수레에 내가 싣고 다니면서 귀신에게 절을 하고, 귀신을 모시고, 귀신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이 수레를 직접 확인한다면, 귀신이 나타나든, 하느님이 나타나든, 악마가 나타나든, 부처님이 나타나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내가 싣고 다니는 물건들일 뿐이지요. 내가 실을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정말 자유로운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마음공부란 이름으로 하는 공부에서는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 그것을 불교에선 자재(自在)라고도 하고, 해탈(解脫)이라고도 하는데,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이 자유를 맛보고 확인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면서도 스스로가 싣고 다니는 물건들에 매여서, 그 물건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공부를 제대로 했다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공부를 되돌아볼 때 자기가 무엇에 매여 있는가, 아니면 진실로 무엇에도 매여 있지 않는가를 통해 자기의 공부를 확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대승, 큰 수레라는 말은 정해진 크기다 없다는 말입니다. 작게 접으면 한없이 접어서 더 이상 작을 수 없이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큰 수레라는 말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말이지 꼭 들어맞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에다가 ‘도(道)’라는 둥, ‘마음’이라는 둥, ‘진리’, ‘부처’, ‘법(法)’, ‘창조주’, ‘신(神)’... 온갖 이름을 갖다 붙이지만, 사실은 어떤 이름도 알맞은 이름은 아닙니다. 어떤 이름도 붙을 수 없습니다.
이름이 붙을 수 없는 ‘거기’에 우리가 억지로 이름붙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름을 붙이는 것이 버릇이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보통 말하는 교육이라는 것도 아이 때부터 어떤 이름을 가르치고, 그 이름에 대한 뜻을 익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름에 따라서 그 이름이 가리키는 뜻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이름이라는 놈이 예컨대 ‘대승’, ‘하느님’, ‘부처’, ‘촛대’, ‘시계’, ‘컵’... 뭐라 하든지 간에, 지금 이 말이, 이 이름이, 이 동작이 일어나는 이 자리가 확실해야 합니다. 자기가 그 자리에서 확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확고부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라는 이름도 억지로 붙이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머묾 없이 흘러가는 것인데, 흘러가는 곳곳이 곧 머무는 자리입니다.

인위적으로 정해놓은 자리는 자리를 옮김에 따라 바뀌지만, 확인해야 할 변함없는 자리라는 것은 걸음걸음 걸어갈 때, 그 걸음걸음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변함없는 자리입니다. 한 발 두 발 딛는 이 자리가 변함없는 자리이고, 한 생각 두 생각 일어나는 이 자리가 변함없이 떠날 수 없는 그 자리이고, 한 번 눈길을 돌리고, 한 번 귀를 기울이는 이 자리가 바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사실은 절대로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단지 벗어나 있다는 망상을 할 뿐입니다. 여기는 여기고 저기는 저기고, 이런 식으로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다고 말입니다. 사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이 자리가 확실하다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공간은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서 있는 그 자리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의 수레를 내가 손으로 움직이는 자리입니다.

그럼 금강(金剛)은 도대체 무엇인가? 금강경을 영어로 번역하면 ‘다이아몬드 수트라(Diamond Sutra)’라고 합니다. 금강이란 것은 다이아몬드입니다.   모든 것을 다 끊을 수 있지만 스스로는 끊어지지 않는 가장 단단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다이아몬드라고 합니다. 역시 이 자리를 형용하는 말입니다. 왜 그러한가?
금강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것’이 사실은 우주를 조각조각 잘라서 우리 앞에 드러내고 있고, 시간을 조각조각 잘라서 지금 몇 년 몇 월 며칠이라고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별심(分別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분별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색깔과 모양, 귀에 들리는 여러 소리, 코로 맡아지는 여러 가지 냄새,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의 여러 모습... 전부 이것이 조각조각 잘라서 그 다양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대상은 얼마든지 자를 수 있어도 자기 스스로는 절대 잘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자를 수는 있지만 스스로를 자르지 못하는 이것을 중국의 선사(禪師) 스님들은 칼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금강이란 스스로는 변함없으면서 모든 것을 잘라서 눈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음에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이라...
그런데 사실은 대승(大乘) 한 단어 가지고 끝까지 다 하고 싶은데... 여기서 제가 직접 보여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런 글자가 아닙니다. 금강경의 수다한 내용들이 아닙니다. 딱 <하나>만 알면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손아귀에 쥐고 있고, 눈 속에 넣어 다니고, 귓속에 담아 다니고, 머리 속에 가지고 다니고, 발밑에 깔고 다니는, 딱 <하나>만 알면 됩니다.
이것만 알면 금강경 32분(分)까지의 구차한 내용들은 아무리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이라 하더라도 쓸데 없는 말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대승’이든 ‘금강’이든 이런 말들의 뜻을 따라가지 마시고, 이런 말들이 참으로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반야바라밀이라... 반야(般若)는 지혜라는 뜻의 인도 말을 한자로 흉내 낸 것입니다.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도피안(渡彼岸), 피안으로 건너가다라는 인도 말을 한자로 옮긴 것입니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이란 피안으로 건너가는 지혜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피안으로 건너가는 지혜라... 피안(彼岸), 저쪽 언덕. 그럼 우리는 이쪽 언덕(此岸)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는 지혜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이쪽 언덕에 있는 셈이 됩니다. 그럼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이라는 말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쪽 언덕은 어디 있는 무엇이고, 저쪽 언덕은 또 어디 있는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가야할까요?
본래는 이쪽 언덕이라는 말과 저쪽 언덕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두개의 언덕은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하나의 언덕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이쪽 언덕, 저쪽 언덕으로 나눠놓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쪽 언덕이니 저쪽 언덕이니 하고 나눌까요? 방편상의 말입니다.

이쪽 언덕의 특징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색깔과 모양 그 이상을 알지 못하고, 눈으로는 색깔과 모양만 보는 줄 알고 있고, 귀로는 소리만 듣는 줄 알고 있고, 머리로는 생각하고 욕망하는 줄만 알고 있고, 육체는 그냥 피와 살로 이루어진 물질 덩어리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언덕이 이쪽 언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양을 따라서, 모양에 구속되어서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고,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고,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이쪽 언덕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말과 생각과 분별을 잘하고, 말에 따라 생각하고, 말에 따라 살아가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이 이쪽 언덕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쪽 언덕의 특징은 무엇인가? 저쪽 언덕에 사는 사람들도 말을 할 줄 알고, 생각도 할 줄 알고, 색깔도 볼 줄 알고, 소리도 들을 줄 아는 것은 꼭 같습니다만, 이런 것들로부터 조금은 자유롭습니다. 말을 하지만 말에서 조금 자유롭게 벗어나 있고, 색깔을 볼 줄 알지만 색깔에서 조금 자유로운 것입니다. 왜 조금 자유롭다고 하느냐 하면, 말로써는 완전히 벗어나 있어야 자유롭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러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이쪽 언덕 생활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저쪽 언덕으로 발을 한번 옮겼다 하더라도 이쪽 언덕 생활에서 금방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쪽 언덕의 생활과 저쪽 언덕의 생활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이쪽 언덕의 생활에서 저쪽 언덕 생활로의 변화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마음공부라는 것을 하면서 내면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변화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면, 제시할 만한 것이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달라진 것도 있는 것입니다.
이쪽 언덕, 저쪽 언덕이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저쪽 언덕이라는 것이 따로 없지만 역시 이쪽 언덕은 이쪽 언덕이고, 저쪽 언덕은 저쪽 언덕입니다. 저쪽 언덕이라 하는 것은 이쪽 언덕에서 구속받고 갈등하던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다 라고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 대승이라 하고, 금강이라 하고, 반야라 하는 ‘이것’을 확인하는 일에 있어서는 결코 말로써 모든 것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흡사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되, 자기가 만진 부분만이 코끼리라고 알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번 만져보고서 전체 코끼리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코끼리처럼 정해진 크기와 모양이 없기에 어느 부분에서 한쪽만 뚫을 수 있다면,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아~!”하고 확인이 된다면, 그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길이 더 남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흔히 허공에 비유됩니다. 우주 전체도 허공입니다. 하늘도 허공입니다. 방 안의 공간도 허공이고, 우리 손아귀 안도 허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손아귀 안의 허공만 알아도 우주 전체의 허공을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공부를 하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아~!”하고 확인되면 그것으로서 다 맛을 본 것입니다. 마치 바닷물이 어디서 맛을 보든 한 맛이듯 말입니다. 부산 앞바다 바닷물의 맛을 본 것이 바로 태평양 전체의 바닷물 맛을 본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문득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을 보림(保任)이라고 하는데, 상당한 시간 동안 과거의 습(習)을 점차점차 녹여내야 합니다. 녹여낸다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따로 녹여낼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는 체험을 해보시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강경이라 하지만 사실 뭐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지속적으로 온갖 손짓발짓, 온갖 말을 통해서 항상 <하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떤 말 구절, 어떤 손짓발짓 가운데서 제가 가리키고자 하는 <하나>만 탁! 하고 눈치채면, 그러면 됩니다. 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금강경의 전체 내용을 글자 구절을 하나하나 따져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으로 들어옴에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入此門來 莫存知解)’란 말이 있잖습니까? 알음알이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금강경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 <하나>, 이 <하나>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고, 이 <하나>만을 맛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경(經)’이라는 말도 보통 알기로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알고 있는데,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말씀이 어디 있는 무엇입니까? 부처님이 무엇입니까? 부처님이든, 도(道)든, 하느님이든, 창조주든,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름에 속지 않을 수 있다면 ‘선풍기’, ‘형광등’, ‘방석’... 이래도 상관 없습니다. 모두 같은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어디에 있느냐? 여기 말 속에 있습니다. “부~, 처~, 님~”이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이 지금 드러내고 있는 것, 이것이 부처님이에요. “부~처~님~”이라는 말이 드러내고 있는 이것을 “선~풍~기~”라 한다고 해도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절에 열심히 다니시던 분들은 이 말에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부처님하고 선풍기하고 어떻게 같아?’ 하고 말입니다.
그것을 같지 않게 보는 것을 금강경에서는 ‘중생(衆生)’이라 그랬고, 그 둘을 다르지 않게 보는 것을 금강경에서는 ‘여래(如來)’라 그랬습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는 우리는 응당 다르지 않게 보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이지, 다르게만 보아서는 금강경을 천 날 만 날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르지 않은 <하나>를 확인하는 공부가 금강경 공부고, 불교 공부고, 선(禪) 수행입니다.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두 개를 다르게 보면 그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이것을 ‘번뇌’라 합니다. 이러한 번뇌 없이 두 개를 다르지 않게 보는 것을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도 하고, 더 나아가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합니다. 이것 <하나>를 확인하기 위해 금강경을 보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속는 것은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주입되고 익혀 온 말입니다. 말에 속아서 부처님을 모시고, 악마를 미워하고,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싫어합니다.

금강경의 요점을 달리 말하면 ‘말에 속지 말라’ 이거예요.
 
한국 불교는 간화선, 화두 불교인데, 화두의 요점도 ‘말에 속지 말라’ 이겁니다. 말에 속지 않으면 1700 공안(公案)의 답이 분명한 것이에요. 말에 속으니까 온갖 망상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망상과 말이 나오면,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경(經)’이라는 말도 결국은, 바로 지금 여러분이 눈앞에 보고 있고 손아귀에 쥐고 있고, 귀에 담아 다니고, 머리 속에 넣어 다니는, 결코 부정할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그것을 이렇게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경~!”이라는 말로. 

만약에 ‘대승’, ‘금강’, ‘반야바라밀’, ‘경’ 이라는 한자(漢字)의 뜻을 따라서 풀이하고, 그것을 ‘그래, 그런 뜻이구나.’ 한다면, 마치 도화지에 떡을 그려놓고 배를 불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말뜻을 따라 이해를 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그림만 그리고 있을 게 아니고 실제 떡을 먹고 배가 불러야 합니다.

--------------------------------------------------------------------------------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경의 본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다. 여기에서는 <대승금강반야바라밀경(大乘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고 하였는데, 이 경전 강의의 자료로 삼은 금강경에 그런 제목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승(大乘)이라는 글을 앞에 붙인 이유는 금강경 제15분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에서 “여래는 대승의 마음을 낸 자를 위하여 설법하신다.(如來爲發大乘者說)”라는 구절을 염두에 둔 때문이라고 보인다.

출처 : 지금 이순간!!
글쓴이 : 징검다리 원글보기
메모 :

'사경기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金剛般若波羅蜜經 (12)  (0) 2007.02.24
金剛般若波羅蜜經 (11)  (0) 2007.02.24
金剛般若波羅蜜經 (10)  (0) 2007.02.23
金剛般若波羅蜜經 (9)  (0) 2007.02.23
金剛般若波羅蜜經 (8)  (0) 2007.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