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 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다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 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어다 보니,
그녀의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 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한 움큼 남아있는 둥근 사리들!
__시집「사라진 손바닥」 (문학과 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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