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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시방

어떤 출토(出土) / 나희덕

by 慧明花 2020. 12. 26.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 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다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 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어다 보니,

그녀의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 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한 움큼 남아있는 둥근 사리들!

 

__시집「사라진 손바닥」 (문학과 지성사. 2004)